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눈물"
부르심을 받은 사역으로 인해, 부산에 살게 된지 19년 째입니다. 20년 가까이 살면서 이젠 완전히 부산 사람이 되었죠..^^ 동래식물원 근처 원예교등학교 근처인가요? 우장춘로라고 하는 길이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훌륭한 지인에게 메일로 받은 글이라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장춘 박사(한국원예연구소장 재임시)가 왜 아직도 "씨없는 수박 만든 사람" 으로만 알려져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씨없는 수박은 '기하라 히토시' 라는 이름의 일본인 박사가 처음 만들었고, 그걸 우 박사가 한국에 들고 온것인데도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장춘 박사는 일제와 6.25전쟁이 말아먹은 불모지 한반도를, 먹고 살만한 땅으로 바꿔 놓은 구국의 위인이다.
우박사는 출생부터가 기구했다. 1898년 생인데, 아버지가 친일부대의 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역적 우범선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전세 역전,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 우범선,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이 우장춘이었다. 조국을 배신한 역적의 최후는 비참했다.
우범선은 우장춘의 나이 5살 때 대한제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 억울한 면도 있다는데, 그 문제는 그 정도 해두고...
이때부터 우장춘 가족(가운데 우장춘. 아버지 우범선(왼쪽)의 죽음으로 이 가족은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진다)은 그야말로 떠돌이 집시만도 못한 최악의 삶을 살게 된다. 조선에선 배신자 역적의 가족, 일본에선 이용가치 없는 쓰레기 트기 가족으로 전락, 과부가 된 장춘의 어머니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기게 되고, 조선인 우장춘은 고아원생들의 무지막지한 이지메 공격에 시달린다.
일반적으로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들고 폭력에 시달리고 크면, 나중에 일탈행위를 하기 마련인데 우장춘은 그 반대였다.
그는,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돼서 너희들에게 복수하겠다' 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장춘의 어머니는 훌륭한 여인이었다. 기어코 돈을 벌어 장춘을 집으로 데려와 대학까지 보낸다. 그것도 그냥 대학이 아니라 명문 동경제국대학을.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을 졸업한 장춘, 일본 농림성에 취업해 혁혁한 업적을 쌓으며 승승장구한다. 일본에서 살아남는 길은 일본 이름을 쓰는 것 밖에 없었기에, 그는 결혼하려고 일본인의 양자가 돼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지만, 정작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논문과 공문 기록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한국 성인 "우"를 집어 넣었다.
그러자 조센진의 승승장구를 못봐주는 일본은 1937년 그를 해임한다. 왜? 일본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 후 지방의 농장장으로 재취업, 연구 활동에 몰두하여 그는 일본 이민자 역사에 빛나는 태양으로 남을만큼 육종학계 최고 권위자라는 명예를 얻었다.
(동경제대 재학시절 우장춘)
별 욕심 부리지 않는다면 여생을 나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자신의 아버지를 가혹한 운명의 역사 소용돌이에 끌어 들였고, 자신의 가족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혹독한 차별과 폭력의 나라였다. 일본에서 이민자가 얻을 수 없는 엄청 높은 지위를 얻긴 했으나 그건 순전히 그의 실력때문이었던 거고.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아니 대한민국은 1947년부터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실력자 우장춘을, 역적의 아들로 낙인 찍고서도 "같은 민족" 이라는 미끼로 영입하고자 했다.
미리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를 만들어 우장춘을 위해 소장 자리를 공석으로 둔 상태로, 가족에게 "이적료"로 당시 엄청난 돈이었던 1백만엔을 보낼 정도로 열성이었다.
조선은 일본에게 짓밟힌 불쌍한 약자였고, 우장춘은‘난 조선에서 죄인이겠지’라는 생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이 애타게 그를 찾기 시작하자, 아직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조선은 여전히 그의 뿌리였기에 운명이 정해준 사명으로 알고 당시 전쟁중인 한국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조금이나마 아버지의 죄도 씻고 조국에 보은하고자, 한국 전쟁이 한참이었던 1950년 부산에 와서 그 나이에 군복무까지 했다. 초청한 관료들이 군 면제시켜 주려고 해도 우장춘은 거부하고 입대를 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쓰라고 준 돈 1백만엔을 탈탈 털어 한국에 심을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우장춘. 당시 연구소는 소장 자리만 만들어 놓고 잠 잘 곳도, 수돗물 나오는 곳도, 전기 들어오는 곳도 안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입을 옷도 없어서 행사장에 누더기 외투에 고무신 끌고 나갔다 할 정도로. 전쟁으로 쑥대밭된 나라엔 아무것도 없었다.
식량조차 자급자족이 안되는 나라, 이 처절한 대한민국에서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우수 과일품종 제주감귤) 10 여년 동안 우장춘은 대한민국을 기어코 구원하고야 마는데, 최단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한해 두번 수확하는 벼 품종 등 20여 품종의 종자를 개발, 보급하여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업적의 핵심은 바로 우량 종자 개발.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로써, 이로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됐다. 우장춘이 얼마나 천재였는지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바로 제주 감귤이었다. 이 엄청난 작물의 종자와 재배 기술을 창작해 낸 것도 모자라, 제주와 남해안 일대에 생산지를 구축, 감귤 산업을 일으켜 세웠다. 이뿐이 아니다. 강원도 감자가 특정 바이러스에 너무 취약해 한번 창궐하면 전멸하곤 했고, 그때마다 강원도민의 상당수는 굶어죽기도 했다는데, 그가 종자를 개량시켜 면역을 가진 강력한 작물로 탈바꿈시켰다. 또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수 있도록 개발해서 원예산업을 일으켜 세웠는데, 일본에서도 깜짝 놀랐던 엄청난 업적이라는 것이다.
십이지장 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도 한참 실험중이던 일식이수(一植二收)의 벼를 비닐봉투에 넣어 링거병이랑 같이 걸어 놓고 관찰할 정도였다. 우장춘 박사는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해 준게 아니라 경제와 산업을 창출하는 기반까지 닦아 준 그 당시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천사였던 것이다. 근데 이승만 정권은 우장춘을 철저히 이용만 해 먹었고, 이후 국민 영웅이 되는 것에는 경계를 했고 그 권력을 나눠 가지자고 할까봐 겁을 내어, 이제는 꼬투리를 잡아 공격했다.
평소 바른 말을 잘하는 우장춘이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해 입바른 소릴 했다고, '사상에 문제가 있네' 라며 출국금지 시켰고, 우 박사가 한글의 읽기, 쓰기, 듣기는 다 잘 하는데 말하기가 서툴고 대신 일본말은 잘하는 걸 알고, 당시 권력자들은 대놓고 구박하고 모욕을 주거나, 공개석상에서 ‘일본말만 지껄일 줄 알면서 무슨 애국을 하겠냐’며 망신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우장춘 박사는 어머니가 작고하셨을 때, 딸이 결혼을 했을 때도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출국 금지를 시켰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딸의 결혼도 함께 하지 못한 우장춘. 아들로서 아비로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고, 세계적인 유전학 석학이 한국에 와서 졸지에 감금된 외국인 노동자 신세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의 과학자와 엔지니어에 대한 처절한 냉대 전통이 시작되었다고.. 그럼에도 우장춘은 더 우수한 벼 품종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시키려고 끝까지 노력한, 조선인을 위해 마지막 생을 바친 사람이었다.
(한국 땅에서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있는 우장춘)
말 그대로 대한민국을 위해 온몸을 불살은 영웅이었다. 한국의 모든 전후 세대는 이 위대한 인물에게 큰 빚을 졌다. 1959년 죽기 하루 전 정부로부터 문화포상 받은 우장춘, "조국이 날 인정했구만... 근데 좀 일찍 해 주지..."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철철 흘렸다고 한다. 정권의 사람들은 우장춘의 업적을 기록에 남기는 것조차 소홀했다.
아니 시대의 영웅에 비해 자신들의 소홀과 무능이 역사에 드러날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서점에서 책을 찾아도, 우장춘에 관한 콘텐츠는 코흘리개 애들 교과서 한귀퉁이에 실릴 정도의 분량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구국의 영웅이자 만능 천재 과학자 우장춘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자기들만의 것이어야 한다는 정치세력들의 본심에 의해, 아니 그 권력을 욕심내지 않음에도 견제에 의해 우리 역사상 이순신 등 많은 영웅들이 희생되어졌다.
권력층의 속성이 그렇더라도 국민들은 그 영웅을 지켜줬어냐 하는데, 국민들은 과실은 따 먹고 순간 열광만 했지 비겁함을 떨치지 못했다.
자료 제공 : yyw-99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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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칭&리더십,독서경영&북코치,자기계발&창의력
코칭리더십센터(www.coach777.com) 김정규 coach777@naver.com



















정말 덕분에 좋은 지식 얻어갑니다.
우장춘 박사님 하면 다들 씨없는 수박을 만들었다 이것만 알고있지
언제 태어나셔서 언제 세상을 떠나셨는지도 모르던데
덕분에 좋은 지식이 많이 퍼질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